퇴사
- 퇴사를 앞두고 여행을 떠났다. 지난 2년 8개월의 시간들을 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퇴사를 하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 어떤 기분으로 일을 했는지 이런 게 신기루처럼 흩어져서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남는 건 계속 연락하며 지낼 동기들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 회사와 커리어는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퇴사하면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이었구나. 허무하고 홀가분하다. 회고를 한 다음에 잡생각을 비워내려고 했으나, 그럴 생각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편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 새로운 회사 입사 전에 브런치와 블로그에 적어놨던 글을 읽어보았다. Today i learn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2020년의 나 자신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겨우 3년차이긴 하지만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고 열정만 가득했던 신입 시절의 나에 비해서 많이 성장했다. 면접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3년간 수고했어.
- 퇴사하고 개발자가 된 동기와 밥을 먹었다. 들었던 이야기중 "개발자가 되니 기획서를 잘 읽지 않게 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생각해보면 나랑 같이 일했던 개발자들도 회의 때 말했던 내용을 또 물어보거나 잘못 이해했던 일이 태반이었다. 개발자를 탓할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내 기획서를 100% 전달시키는 것이 기획자인 내 실력이지 역할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직
- 첫 출근 전에 정성스러운 새 팀의 환영 메일을 읽었다. 정말 오랜만에 기분 좋은 설렘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시작을 앞두고 걱정을 너무 많이 했었다. 새로운 반에서 적응해야 하는 새 학기가 너무 스트레스여서 3월을 싫어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 첫 출근은 걱정보단 설렘이 훨씬 앞섰다. 새로 맡게 될 일이 무척 기대되었다. 나의 드림 컴패니이자, 전 국민이 쓰는 서비스를 기획하려니 너무 행복했다.
-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줄어든 이유는 왠지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인데, 그건 내가 3곳이나 최종합격을 한 덕분이다. 나를 택한 여러 회사의 안목을 믿어본다. 나름 쓸모 있는 실력을 가졌으니 여러 곳에서 합격한 거겠지 뭐.
- 온보딩 때 내가 팀에서 하게 될 일에 대한 내용과, 현재 팀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단순 사용자의 입장에서 서비스를 이용해오다가, 내부 기획 배경을 들으니 너무 흥미로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용자였던 내가 기획자가 돼서 직접 앱을 만들다니 너무 신기하잖아! 앞으로의 업무가 너무 기대돼서 무려 월요일에 기분이 좋았다. 아니, 월요병 퇴치가 가능한 것이었다니. 나도 놀랍다. '사람'이나 '연봉'도 회사 만족도에 중요하지만, '업무'의 영향도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한편으로 내가 붙었던 회사 중 다른 회사에 갔어도 과연 이정도 만족스러운 업무를 맡게 되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나는 그저 나에게 가장 좋은 조건의 회사를 골랐을 뿐인데, 업무까지도 이렇게 잘 맞다니! 업무나 팀은 운에 따라야 하는 복불복이니, 가장 처후가 좋은 곳을 택해야 하는 게 진리임을 느꼈다. 첫인상으로 보자면 이번 복불복은 성공인 것 같다.
- 경력으로 입사하니 확실히 신입 때와 달랐다. 그 중 하나가 '회사에 대해서 쉽게 실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입 때는 기획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내 예상과 다를 때 실망했던 것 같다. 그리고 커리어가 내 계획대로 안될 때 괜히 마음이 앞서거나 조급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면 하루종일 그런 걸로 마음 쓰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그 순간이나 그 회의에서만 고민하고 끝. 회사란 게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다는 것을 이미 너무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그리 신경 쓰지 않게 된 거 같다.
- 회사 문화가 주니어에게 시니어의 역할과 실력을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덕분에 마음이 편했다.
그치만 원한다면 실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얼마든지 주는 곳인 듯하다. 충분히 적응하고 실력을 쌓는다면 앞으로 여러 다양한 기획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초심을 잃지 말고, 너무 현실에 안주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나중에 때가 된다면 이 회사에서 주도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
이번 달 문장 모음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매일 부족한 나를 발견해. 벌써 12년 차지만 아직도 내 일이 너무 어려워. 해도 해도 능숙해지지 않는 종류의 일이 있다면 아마 이런 일이 아닐까라는 싶을 정도로. 하루에도 변수와 오류가 수십 개씩 터지는 환경에서 ‘완벽한 통제권’을 갖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거든.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문제가 쉬운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어느 순간부턴 인정하게 된 거 같아.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를. 세상의 그 어떤 기획자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한 서비스를 만들 수는 없거든. 그래서 이 일을 하며 중요한 건 ‘내가 틀릴 수도 있다’ 혹은 ‘모를 수도 있다’는 전제를 기본으로 갖는 거야.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제일 위험하거든. 연차가 쌓이며 딱 하나 능숙해진 게 있다면 돌발 상황을 대하는 마음가짐 정도인 것 같아. 스스로를 과하게 자책하지 않고, ‘다음’만을 생각하는 것."
=> 세상 멋있고 단단해 보이는 기획자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구나. 평온해보여도 항상 마음속에서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나로서 너무 힘이 되는 인터뷰 내용이었다.
제 대학 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 내 대학 생활도 돌이켜보면 길 잃음의 연속이었던게 생각난다. 그리고 입시와 취준을 겪을 때 나 스스로에게 불친절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래서 서로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친절하자는 이 연설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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